(함양 20) 651
농월정(弄月停) 2


건축물은 한 번 짓고나서 매년 조금씩 보수를 해나간다면 반영구적인 인공물이다. 제대로 짓겠다는 마음을 내어 이 멋진 곳에 걸출한 정자를 세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늘 예산과 시간에 쫓겨 가며 일하는 습관은 언제쯤이면 사라질지 아득하기만 했다. 국민소득 5만 달러 이상이 되어야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농월정에 올라 화림동 계곡을 무심히 바라보는 느낌이 좋았다. 이런 곳에서 옛 날 선비라면 최소 시 몇 수는 저절로 읊어야만 제대로 된 선비라고 대접을 받지 않았을 까 싶었다. 2층 높이의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월연암 너른 암반위에서 계곡을 감상하는 느낌이 달랐다.
농월정 정자위에서는 정적인 감흥 속에 세월을 유유자적하며 살아가고픈 욕망이 솟아났고 월연암 반석위에서는 흐르는 물과 함께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픈 욕망이 일었다. 더불어 아직도 내 몸속에는 무엇이든지 도전해도 이루어 낼 것 같은 용기가 솟았다. 같은 공간임에도 어디에서 자연을 바라보느냐가 생각과 느낌을 갈랐다. 멋진 계곡에 정자문화가 발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
화림동 계곡을 사이로 두고 지금은 많이 훼손 되었으나 아직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울창힌 송림은 이곳을 신선이 사는 곳 인양 느끼게 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주는 감흥이 대단했다. 농월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식의 정자로 뒷면 가운데 한 칸에 방을 두었고 네 귀퉁이에 활주를 두었다. 활주 밑 부분은 자연암반 위에 돌기둥을, 윗부분은 나무기둥을 세웠는데 옛 모습 그대로 재현 했다고 한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던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1571∼1639)가 1638년에 지었다고 한다. 그는 임진왜란과 광해군 집권, 인조반정과 정묘호란의 혼란한 시기를 몸으로 부딪치며 겪은 후(병자호란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농월정을 짓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족함을 안다는 것을 호로 사용할 만큼 험난한 세월을 보내면서 살았던 경험이 평생에 걸쳐 느낀 지혜가 되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는 이웃사촌처럼 닮았다.
AI의 도움을 받아 농월정에서 옛 선비처럼 나도 시조 한 수를 읊어본다. 막상 지어서 소리내서 읽어보니 풍류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듯했다.
靜夜弄月停作(정야농월정작)
淸風明月夜 청풍명월야
獨上弄月停 독상농월정
石榴開嶺外 석류개령외
錦水繞江流 금수요강류
塵世慕幽趣 진세모유취
撫琴洗俗情 부금세속정
一聲寒玉響 일성한옥향
萬念隨聲息 만념수성식
청풍명월 밝은 밤, 홀로 농월정에 오르니
석류꽃은 언덕 너머 피고, 강물은 비단처럼 흐른다.
세속의 번다함을 벗고 고요함을 그리며
거문고를 뜯어 속세의 정을 씻어낸다.
맑은 음 하나 울려 퍼지니
모든 번뇌가 그 소리 안에 잠든다.
(2024.7)
'산행기,여행기,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함양 22) 653 농월정 4 (5) | 2025.08.09 |
|---|---|
| (함양 21) 652 농월정 3 (5) | 2025.08.09 |
| (함양 19) 650 농월정(弄月停) 1 (3) | 2025.07.30 |
| (산청 22) 649 지리산 에필로그 (2) | 2025.07.20 |
| (산청 21) 648 지리산 날 다람쥐 (0) | 2025.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