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21) 652
농월정 3



사람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험난한 세파를 직접 경험해 봐야 비로소 겸손해지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표를 찾게 되는 듯했다. 박명부선생이 광해군 시절 합천 군수로 부임했을 때 북인의 영수이며 광해군의 남자였던 정인홍이 합천에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지조 높은 꼿꼿한 선비였다고 한다. 그런 꼿꼿한 성정을 지닌 선비였기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지족(知足)에 담긴 내용도 그런 삶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법이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철이 든다는 말이 있듯이 살아 있는 동안은 목표가 있든 없든 늘 불완전한 삶에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의 숙명이다. 화두를 틀고 용맹정진해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제대로 모르고 한평생 살다가는 것이 인생인데 그는 말년에 고향에서 유유자적하며 멋진 인생을 산 듯했다.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그것을 벗 삼아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주어진 형편에 만족하며 노년을 보낸듯했다.
정자까지 지을 정도의 재력이 있었으니 말년의 삶은 그의 말대로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산 듯했다. 농월정(弄月停)의 농월의 해석이 분분했으나 달을 희롱하다는 뜻과는 달리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맑은 바람과 달을 즐기며 시를 읊는 풍류에 방점을 두었다고 보면 맞을 듯싶었다. 한편으로 농월의 ‘농(弄)’은 ‘옥(玉)’을 ‘두 손으로 받들어 조심스럽게 만지는 형상이라고 해석된다고 하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뜻과는 괴리가 느껴졌다.
박명부 선생은 음풍농월을 즐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임진왜란, 정묘호란 등을 겪으며 몸소 느낀 심정으로 두둑한 배짱과 의기로 뭉친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할 인재나 지혜를 간절히 염원하는 의미도 담았다고 한다. 험난한 세태를 살면서 뼈 속 깊이 각인된 생각이 한갓진 계곡에 세운 정자 이름을 짓는데도 투영된 듯했다. 제법 큰돈이 들어가는 건축물에 이름을 짓는 것은 그 당시에는 무척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일이었기에 신중을 기해서 지었을 것이다.
(2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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