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1) 714
만리포 해변



태안의 바다는 조용한 고백처럼 다가왔다. 파도는 부드러웠고, 모래는 오래된 기억처럼 따스했다. 태안 해안국립공원이 품은 서해의 풍경은, 말 없는 위로의 손길이었다.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오히려 그 가까움이 이곳을 멀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드러운 파도가 매혹적인 태안은 태안 해안국립공원을 보유한 서해의 관광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장 530 여 km에 달하는 리아스식 해안은 비밀처럼 굽이굽이 이어져 있고, 사이사이 만리포와 꽃지 같은 예쁜 이름의 해변들을 살며시 숨겨 두고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그러하듯, 조용하고 웅장한 아름다움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완만한 지형을 지닌 서해안 해변은 그야말로 천혜의 해수욕장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랑 받아 왔다. 2025년의 봄, 봄의 여왕으로 불리는 목련을 따라 천리포 수목원에 들렀다가 문득, 만리포 해변과 신두리 사구에 발길이 머물렀다. 해변에 담긴 ‘만리’라는 이름의 과장도 막상 백사장을 마주하면 문득 그런 허풍조차 진실처럼 느껴진다.
해변은 완만했고, 파도는 조용히 밀려와 모래 위에 입을 맞추었다. 모래밭엔 철새와 갈매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놀면서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은 듯했다. 밀려오는 파도는 마치 깊은 꿈의 가장자리를 적시듯이 다가왔고, 나는 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며 어느샌가 내 안에 쌓여 있던 세속의 무게가 조용히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평화가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된 기억 속에서, 잊혔다가 다시 피어나는 어떤 노래처럼.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살아 있음을, 다시금 '나'로 존재함을 느꼈다. 커다란 해변은 거의 비어 있었고, 그 빈 공간 속에서 오직 자연만이 제 역할을 묵묵히 다하고 있었다. 파도는 밀려오고, 새들은 날고, 바람은 그들 모두를 안아주었다. 인간의 시선에는 유유자적해 보이는 이 풍경도, 실은 보이지 않는 긴장의 끈 위에서 이루어지는 생존의 무언극이 아닐까 했다.
생존경쟁은 창조주가 모든 생물의 유전자에 아로새겨 놓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신이 심어놓은 유전자의 언어라면, 우리는 모두 그 언어를 해독하며, 번역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목매인 운명이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게 마련이다. 철 지난 바닷가. 그 끝없는 백사장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이곳이 인간의 세계인지 아니면 저 너머의 세계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내게는 다만, 바다가 있었고, 그 바다를 바라보는 내가 있었을 뿐.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잊히지 않을 진실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2025.4)
우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동등해야 하고 서로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며 또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안셀름 그륀, 삶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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