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기,여행기,수필

(영덕 6) 661 목은 이색 기념관

(영덕 6)  661

 

목은 이색 기념관

 

마을 가운데를 관통하는 고샅길을 걷는 맛이 좋았다. 오래 된 담장이 주는 편안함과 도심과 다른 전원마을이 주는 낮선 풍광이 나를 새롭게 했다. 목은 이색 기념관으로 이어지는 길도 운치가 있었다. 기념관 가는 길가에 있는 한 고택 마당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의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을 개의치 않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바쁜 도시인들에게 신선한 청량감을 느끼게 해 줄 정도로 행동에도 서두름이 전혀 없었다. 순간,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색 기념관은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이곳 역시 넓은 마당이 있었고 전시관은 소박한 느낌이 날 정도로 작았지만 이색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은 아주 잘 정리해 전시했다. 천천히 둘러보고 살피고자 한다면 최소 1시간 이상은 머물러야 알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이 많았다. 한 사람의 생애도 결코 짧지 않은데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학자이자 조선 초기의 유명한 사대부들의 상당한 수가 그의 제자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와 관련된 내용들이 무척 많았다. 목은 문집 등 저작도 적지 않았고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호불호가 갈린다고 했으나 대체로 좋은 쪽이 더 많아 보였다.

 

유불선에 모두 능통했던 그는 정몽주를 비롯해 권근.이숭인.길재.하륜.정도전.김종직.변계량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문장의 조종(祖宗)”이라는 평판을 받을 만큼 시와 문장에 능했다고 한다. 대사성과 문하시중을 거쳤고 성리학의 발전은 물론 두루 여러 학문과 정치에 큰 족적을 남겼다. 오래 전 서천의 문헌서원 방문 시 그의 묘소가 조선 임금의 묘소에 버금 갈만큼 잘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의 부친인 이곡선생 또한 대단한 학자였다고 하니 태어날 때부터 집안 내력 상 학문에 소질이 있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까지도 이태조의 조선 개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조선 왕조를 세운 사대부들을 키워낸 조선의 사상적 스승이기도 한 목은은 태조 이성계에게 밉보였지만 이 태조가 그를 높게 예우한 것을 보면 그의 인품과 학문이 뛰어 났음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조선 초, , 후기의 그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달랐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 했던 인물이었다는 시대적인 한계가 어느 정도 반영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싶었다.

 

(2024.6)

 

거절은 부끄러워할 일도 내 욕심을 채우는 행위도 아니다. 거절은 삶 속에서 균형을 지키는

지혜이다(정희도, 잘될 운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