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12 ) 603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선생의 생애와 사상
함양여행을 마무리 하는 차원에서 정여창선생의 생애와 시상에 대해 간단히 요약정리한 내용을 공유드리고자 한다 조금 길지만 이 정도는 알아두시면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정여창선생은 젊었을 때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학문과 언행, 덕행 등으로 선비 사회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고 김굉필, 송석충, 김일손, 정광필 등과 주로 교류하였다. 22세에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었고 나라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만 전념했다. 이후 1490년(성종 21) 학행으로 출사하여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 된 그 해 가을,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합격,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지냈다.
당시 세자의 스승 중 한 사람으로 연산군을 지도하였지만 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연산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고분고분하고 조금은 아부에 능한 측근에 비해 강직한 성품을 견지하였기에 연산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했다. 성종 25년(1494년)에 외직인 경상도 안음(지금의 안의면) 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정여창선생은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에게 처음 학문을 배워 성리학을 처음 접했다. 조선건국의 이념인 성리학 연구를 통해 이를 자신만의 것으로 체화 시키고자 노력했다.
첫 스승이었던 이관의는 경술(經術)과 덕행(德行)에 밝았으며 성리학(性理)에 정통하여 당시 학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483년(성종 14) 1월에 임금께서 이관의를 불러서 『대학』·『중용』을 강론하게 할 정도였다. 성은을 받은 관계로 이관의는 죽을 때까지 성리학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를 통해 정여창선생도 많은 동기부여를 받았다. 그의 학문에 대한 자세는 그가 남긴 「입지론(立志論)」 등에 잘 드러나 있는데 그는 선비의 가장 중요한 요건의 하나로서 무엇보다 뜻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달리 말하면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가치관)를 먼저 명확히 한 이후에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하는 듯했다. 이는 곧 스승의 영향이 컸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뜻을 분명히 하는 것은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굳게 지켜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선비가 뜻을 세우고 이를 철저히 지켜 나아갈 때 군자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고 이해했다. 그는 주자서(朱子書)의 강론을 통해 성리학을 폭넓고 깊게 이해하고 있었고 특히 『중용』과 『예기』에 정통하였다. 경명수행(經明修行)은 그의 실천철학이자 신념이었던 것 같다. 특히 그는 사람을 다스리는 것보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수기(修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심학(心學)에 근거한 이학(理學)의 연구에 치중했다.
정여창선생은 성리학이 내세우는 이기설(理氣說)에서 선비로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세상 만물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성리학의 이기설은 본래 자연의 존재법칙을 연구하는 이론으로 이(理)와 기(氣)의 개념을 통해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심성을 설명한다고 한다. 이(理)는 만물의 원리, 본질, 법칙 등을 의미하고 기(氣)는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 에너지, 기운 등을 의미하며 이 두 가지 개념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만물을 생성, 발전시키는 것으로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간단히 요약했지만 이를 깊게 들어가 제대로 공부하고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기설: 이(理)는 불변하는 본질을 기(氣)는 변화하는 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봄)
그의 이기론(理氣論)은 주자의 그것을 이어받고 있지만, 더욱 연구에 매진해 자신만의 이론을 확립했다. 우주의 본체를 이(理)에 의해서 파악하려고 하면서도 기(氣)와 동등하고 균형 있는 상호작용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우주와 인간의 존재와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理)와 기(氣)의 개념을 통해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심성을 이해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범부의 입장에서는 알듯하면서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공부가 필요할 듯했다.
아울러 그는 인간의 심성을 무척 중시하여 인간의 심성이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도덕적 실천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과 수양을 바탕으로 실제로 도덕적 실천에 힘썼으며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학문과 수양에 있어서는 경(敬)과 성(誠)을 중시하여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경(敬)은 마음을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성(誠)은 거짓 없이 진실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 또한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학문 수양방법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자 힘썼다고 보면 될 듯싶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체계화된 이론을 깊이 연구해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체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정여창선생은 그 경지에 도달한 듯했다. 그의 사상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이황과 이이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면 그는 성리학의 대가로 조선시대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회자되는 居敬窮理(거경궁리)와 格物致知(격물치지)는 그 당시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대표적인 학문수행법이었고 지금도 유효하지만 이를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크다고 볼 수 있다. 格物致知(격물치지)는 전 삼성전자 회장을 역임했던 윤종용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늘 강조한 말로 오늘날의 삼성전자를 만든데 크게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의 운명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그는 1498년(연산군 4) 7월에 발생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길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되는 비운을 맞았다. 같은 해 7월 15일 훈구세력인 유자광 등이 성종실록에 기록된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으면서 시작된 무오사화는 김일손, 정여창 등에 대한 몇 차례의 국문을 거쳐 그 관련자들을 사형과 유배 등으로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김일손·권오복(權五福)·이목(李穆)·허반(許盤)·권경유(權景裕) 등은 대역죄를 지었다고 하여 능지처사와 참수형으로, 정여창·강겸(姜謙)·이수공(李守恭)·정승조(鄭承祖)·홍한(洪澣)·정희량(鄭希良) 등은 이를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金宏弼)·이종준(李宗準)·이주(李胄)·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康伯珍)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을 보냈다. 하지만 정여창은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역의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고, 지역의 유지들과 시국담론, 시문을 주고받으며 변방 지역에도 학문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조의제문에 대해서는 다음에 ....)
(2024.5)
居敬窮理(거경궁리):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이치를 추구함
格物致知(격물치지):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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