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기,여행기,수필

(양산 5) 513 통도사 에필로그 1(금강계단)

(양산 6)  513

 

통도사 에필로그 1

 

금강계단(金剛戒壇)

 

대웅전 전각 뒤편에 자리 잡은 금강계단(金剛戒壇)은 보기에는 아주 평이했다. 사천 다솔사에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부도탑과 아주 흡시한 모양의 탑을 중심으로 장방석의 돌이 널찍하게 자리 잡았다. 면적도 꽤 커보였다.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담장 너머로 엿보든지 대웅전 안에 들어가서 자세히 보아야 전체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치아사리(齒牙舍利), 금란가사(金襴袈裟)가 봉안되어 있어 통도사가 불지종가(佛之宗家)이자 국내에서 가장 큰 가람으로서 국지대찰(國之大刹)의 사격(寺格)을 지닌 사찰로 자리 매김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원래 연못이 있었는데 이곳을 메운 후 금강계단을 쌓은 후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는 자장율사가 쌓은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만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계단(戒壇)이란 계()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부

처님 당시 누지보살(樓至菩薩)이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할 것을 청하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허락하여 기원정사의 동남쪽에 단()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은 바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고 하며 통도사가 신라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이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라고 한다.

 

통도사 창건 이후 금강계단은 그 안에 안치된 사리를 친견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특히 불교를 숭상한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외교 사신들까지 수시로 사리를 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황실에서도 금강계단을 참배하러 오는 등 수많은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성() 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고 한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왜구들에 의해 금강계단에 모신 사리 약탈기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스님들의 목숨을 건 노력으로 지금까지 잘 보전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금강계단은 창건 이후 수차례 중수되어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고 했다. 현재 계단의 모습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浮屠)가 놓인 석조계단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佛座像)을 비롯하여 천인상(天人像), 신장상(神將像)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40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곳이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장소이기에 매우 성스러운 곳임에도 화려한 느낌은 없었다. 부처님 깨서 열반하신 그 당시의 상황에 맞게 계단도 수수하게 해 놓은 듯했다. 오히려 그런 점이 이곳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금강계단의 존재로 통도사는 각종 법회(法會) 때마다 삼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설법전(說法殿)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채워지고, 심지어 법당 밖 마당에 까지 자리를 마련해야 할 정도로 법회(法會)에 참여하는 신심 깊은 많은 불자들이 끊이지 않는 대단한 면도 있지만 그 속내는 인간들의 나약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한 방도가 필요한 법인데 그 당시 불교가 전래되면서 나약한 백성들에겐 구세주 같은 존재였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이 겪는 생로병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백성들 눈에는 신과 같은 존재로 비쳐지면서도 범부도 노력하면 부처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기대감 또한 갖지 않았을까 싶다.

 

불가능보다는 아무리 어려워도 노력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례가 있다는 것은 큰 기대심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나약한 인간도 마음먹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다는 것은 창조주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유전자에 창조주의 무한한 능력 중 일부를 새겨 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 경전 중 실천적인 면을 유독 강조하는 대승 경전의 중요 경전인 금강경에 나오는 말이다. 직역하면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라고 하는 뜻인데 쉽게 말하면 어떤 사물이든지 대상에 머무르지(집착하지) 말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본래의 마음이란 집착하지 않는 텅빈 마음이며 무념무상의 공한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텅빈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모든 집착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말이며 곧 깨달음을 뜻한다고 볼 수있다.

 

또한 경이란 것은 계속 읽고 외우면 그 말대로 되기에 불교에서는 매우 강조하는 수행법의 하나라고 한다. 좋은 문장을 소리내어 읽고 외우면 여러 가지로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좋은 생각이 좋은 운을 부르듯이 좋은 문장을 읽고 외우는 것 또한 좋은 운을 부른다고 한다. 쉬운 일이지만 실천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을 내어야하고 될 때까지 지속해야하는 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국 선종 6대 조사이자 선불교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혜능 스님(638-713)께서 제자들에게 도를 닦고 도를 행하는 사람은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해서는 안되고 또한 스스로 내가 잘하고 잘 안다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업신 여겨서는 안된다고 늘 강조했다고 한다. 결국 텅 빈 마음(무집착의 상태)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지 않나 싶었다. 결국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 곧 깨달음에 이르러야 가능한 일을 우리같은 범부가 달성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단지 하나 가능한 것은 매일 일을 마치고 하루를 되돌아 보며 그런 태도와 행동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 냈는지를 되돌아보고 그런 생활태도를 습관화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최선의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모든 다툼과 스트레스는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오는 법이기에 불교에서 강조하는 내용을 예사로이 넘길 수 없었다. 평생 깨달음은 얻지 못하더라도 그 근처에 가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일반 범부와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 늦기전에 작은 노력이라도 우선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내어본다. 통도사를 방문하여 얻은 금강경의 글귀만으로도 통도사 방문의 성과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했다. 60이 넘어서야 비로소 조금씩 철들어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한탄하기보다는 죽기 전에라도 철이 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나 싶다.

 

(2023.8)

 

 

리더들을 지속적으로 키우는 시스템을 가진 나라는 항상 역사속에서 진주처럼 빛났다.

(한홍, 거인들의 발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