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 7) 527
언양 성당 5
한국 천주교회 최초 영세자, 이승훈
오늘날의 천주교회는 신유박해를 비롯해 정해박해와 경신박해 등 수많은 박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한 터전 위에 꿋꿋하게 세워졌다.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따른 필수적인 형태로 실학이 태동되었고 실학이 숭상했던 것 중 과학기술에의 염원이 천주학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배경이 상당한 우여곡절을 격은 후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니 한국의 천주교회가 제자리를 잡기까지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한국 천주교회를 탄생하게 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이승훈, 이벽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 할 듯해 여러 자료를 검토한 후 중요 사항을 간단히 요약하여 알려 드리고자 한다. 방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는 차원이니 그 정도로 이해 주셨으면 한다. 이승훈은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함께 들어가 약 40일간 머물며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그는 1784년 여러 종류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 · 묵주(默珠)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 · 권일신 ·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협의하여 명례동(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 모임을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에 단초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의금부 도사, 평택현감 등의 조선의 여러 관직을 맡았고 을사추조적발사건을 겪은 후에는 잠시 배교도 하였으나 다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진산 사건 등 천주학과 관련 된 사건이 발생 시마다 곤욕을 치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벽 선생
이벽은 원래 무반 가문으로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희망을 버리고 포의서생(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 지냈다고 한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피폐해진 조선 후기에 이르자 조선의 건국이념인 주자학은 물론 당시의 유교적 지도 이념까지도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외교 사신들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게 된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과 중국의 실학자 서광계(徐光啓) · 이지조(李之藻) 등이 저술한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들은 천주교의 교리 · 신앙 · 철학 · 전례와 아울러 서구의 과학 · 천문 · 지리 등의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이벽은 이러한 서적들에 천착, 연구에 매진해 스스로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벽은 서울 수표교(水標橋)에 집을 마련해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교분이 두터운 양반을 비롯해 인척들과 중인 계층의 인물들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천주교를 전교하였다고 한다. 이 때 세례 받은 사람들이 권철신 · 권일신 ·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 이윤하(李潤夏) 등 남인 학자들과 중인인 김범우(金範禹) 등이다.
1777년(정조 1) 권철신 · 정약전(丁若銓) 등 기호 지방의 남인 학자들과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 등에서 실학을 깊이 탐독하고 새로운 윤리관을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는데 이 때 이벽이 천주교에 대해 공부했던 모든 지식을 동료 학자들에게 전수하여, 후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천주교의 미사 집전과 전교를 위해서는 교단 조직과 교직자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우리나라 최초의 교단 조직인 이른바 ‘가 성직자 계급(假聖職者階級)’을 만들었는데 이런 교단 조직은 신부 없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기에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무척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이벽은 이 교단 조직의 지도자로서 집에서 포교(布敎) · 강학(講學) · 독서 등의 천주교 전례의식(典禮儀式)을 주도했으며, 새로 입교한 남인 학자들은 모두 이벽의 제자로 불리어 졌다고 한다.
방대한 내용을 약식으로 서술하였지만 이런 사실만으로도 이승훈과 이벽 두 사람의 역할이 한국 천주교회 태동에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이벽은 그 후 천주교 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히자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가치(예법)의 하나로 삼았던 효 정신(孝精神)의 윤리관과 새로운 학문이자 피폐해진 사회를 변혁시킬 진리로 체득한 천주교 사상 중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심각한 갈등 속에서 고뇌하다가 페스트에 걸려 황망하게 죽었다고 한다.
(2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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