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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여행기,수필

(함양 6) 597 함양 개평마을 1

(함양 6)  597

 

함양 개평마을 1

 

 

밝은 빛이 두루 비치는 곳이라는 함양(咸陽)은 이름 그대로 기운이 밝고 또 맑게 느껴지는 고장이다. 이웃하고 있는 거창과 산청 그리고 장수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예로부터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 부를 만큼 많은 선비와 유학자를 배출한 고장으로 이름난 고장이기도 하다. 인걸은 지령이라고 하였듯이 주변으로 걸출한 지리산을 비롯해 기백산, 금원산 등 1m 대의 고봉이 즐비하고 들판 또한 잘 발달해 먹거리 풍부한 고장으로도 한 이름 하는 고장이 아닐까 싶다.

 

들과 산 그리고 계곡이 잘 발달한 덕분에 인심도 넉넉하고 두루 볼 곳 많은 고장이어서 매 번 올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함양(咸陽)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마을은 이번에 처음 찾았다. 늘 함양에 올 때마다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고택을 찾아봐야지 하면서도 이제야 찾게 되는 실레를 범했지만 이 또한 시절인연이라고 치부했다. 무오사화로 인해 귀양 간 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정여창 선생은 조선시대 유학자로서 대단한 인물임에도 일반인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성종시절의 대학자인 정여창 선생(1450-1504)은 영남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제자로 성리학의 대가로 인정받아 이황, 조광조, 이언적, 김굉필 등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알려진 분이다. 안타깝게도 무오사화(1498)에 연루돼 유배지인 함경도 종성에서 생을 마감했고, 죽은 직후에 터진 갑자사화(1504) 때는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수모까지 겪어 말년과 사후가 순탄치 못했지만, 사후 복권 되어 1568(선조1) 문헌공(文獻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연산군 2(1610)에는 성균관과 향교 문묘에 신주가 보관돼 성리학자로서 가장 큰 영광을 누렸다.

 

다른 말로 문묘에 종사되었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학문의 수준이 공자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대단했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옛 선비들 입장에서는 문묘에 종사(배향)되었다는 것을 생애 최고의 명예로 여겼고 가문의 최대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아두셨으면 한다. 조선시대 동방오현의 한 분으로 추존 되었던 정여창 선생의 고향이자 그가 태어난 마을이 바로 개평 한옥 마을이다.

 

(2024.5)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성숙한 인간으로 평가 된다(애덤 스미스, 도덕 감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