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13 ) 604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선생과 무오사화
정여창 선생은 유배지 함경도 종성에서 7년을 보내고, 1504년(연산군 10) 여름 4월 1일에 병으로 인해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반정으로 사후 복권되고, 중종 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배향)되었다. 조선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희대의 사건에 연루되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당시의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당시에는 대역죄인 등으로 처벌을 받았어도 복권 시키는 놀라운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부분 억울한 경우에 한정 되겠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잊혀진 역사를 들추어 그 당시 잘못된 판단과 관행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인물에 대한 복권은 현대를 사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대단히 미래지향적이고 사려 깊은 제도가 아닌가 싶다.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의 배경에는 연산군의 훈구세력 비호와 더불어 사림파에 대한 배척이 있었는데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약식으로나마 알아 두시는 것이 좋을 듯해 간단히 정리해 본다.
무오사화는 15세기 중반 이후 활발하게 중앙정계로 진출하려던 재야의 사림세력과 기존 집권 세력인 훈구파의 갈등과 대립관계가 「조의제문」을 계기로 구체화된 사건이다. 더불어 평소 폐비 윤씨 복위를 반대하는 사림파를 못 마땅히 여긴 연산군은 이를 기회로 사림파를 제거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사림파의 김일손이 집권 관료들인 이극돈과 유자광 등의 비행을 사초에 기록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극돈 등이 사초의 기록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손이 거절하자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극돈 등은 김일손을 제거할 구실을 찾는 중 김일손의 사초 중에서 「조의제문」을 발견하고, 이를 연산군에게 보고하고 연산군이 직접 이 내용에 관한 사초의 해당 부분들을 검토하면서 사건이 크게 비화되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인 의제(義帝)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애도하는 내용이었는데, 사림을 대표하는 김종직(1431-1492)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던 것을 우회적으로 비난했던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1498년(연산군 4) 7월 11일 처음으로 김일손의 사초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었고 7월 12일에 김일손이 압송되어 오자,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 조의 일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사실대로 말하라” 고 하며 문초가 시작되었고 연루자들에 대한 체포와 심문도 이어졌으며, 그 결과 7월 27일 관련자들에 대한 처결이 있었다. 처결 내용이 끔직했다. 이미 죽은 점필재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김일손 등은 능지처사(凌遲處死), 이목 등은 참(斬)하였다.
기타 관련자로서 정여창·표연말·김굉필 등 19명은 유배 등으로 차등 있게 처벌하고, 비행을 저지른 이극돈 등 8명은 파직·좌천되면서 총 33명이 공식적으로 처벌되었다. 한편 훈구세력인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은 모두 포상되었다. 정여창 선생은 사후에 복권되어 문헌공이라는 시호와 더불어 문묘에 배향되는 명예를 얻었으나 그가 좀 더 살아 학문을 발전시키고 한 마리의 좀 벌레라는 호를 평생 가지고 살았듯이 그런 자세로 두루 어려운 이웃을 살피고 보살폈으면 많은 백성들이 조금은 험난한 삶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에필로그
시간은 흘러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도 다시 땅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인물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역사는 흘러가는 법이다. 아쉬움보다는 역사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비슷한 일은 반복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선조들이 우리에게 내려준 교훈을 바탕 삼아 인격도 도야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작은 노력이나마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각 자 자기 살기 바쁜 세상이지만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한 나라의 국민임과 동시에 세계인으로써 공생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두 정여창 선생을 통해서 나 자신을 비롯해 작금의 세상을 되돌아보고 공생의 삶은 어떤 것인지 되새기게 되었다. 환경문제, 전쟁, 기후 온난화 등으로 지구가 신음하고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나 몰라라 하고 살아가고 있다. 더불어 기아, 전쟁, 질병 등으로 죽어가는 많은 생명들을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문제로 치부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을 돌보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그 화살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배금주의에 물든 세상, 따뜻하고 친절한 말 한 마디와 사랑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요즈음이 아닌가 싶다.
한 마리 좀 벌레라는 의미를 지닌 일두(一蠹)를 자신의 호로 사용한 정여창 선생은 작금의 우리나라의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많이 대비된다. 자신을 낮춘 배경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내면에 자리 잡았다. 한마디로 부끄러워 할 줄 알았다는 뜻이다. 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 것이 쉬운 듯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 행동에 잘못이 있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성하며 이를 고치려고 노력할 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면 짐승과 다름없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내면에 양심을 기반으로 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작금의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수오지심은 커녕 국민들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 혹은 자신들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태가 참으로 볼썽사납다. 제대로 된 사고와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 나라 국민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진중히 생각하고 지혜와 통찰력으로 작금의 무능한 정치 환경을 개혁할 진정한 리더는 어디에 있는가? 작금의 정치 지도자들이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하였다면 지금의 작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들었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릴 줄 알았던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지녔던 정여창 선생을 비롯한 많은 훌륭한 선조 분들이 그리운 오늘이다.
(2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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