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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여행기,수필

(영주 16) 464 무섬마을 입향 조

(영주 16)  464

 

무섬마을 입향 조

 

무섬마을은 태백산에서 내려오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내려오는 서천이 만나 물돌이(태극) 형태로 무섬마을을 끼고 돌아가기에 마을이 마치 물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인다고 해서 물위에 떠있는 섬이란 뜻으로 무섬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태가 무척 독특했다. 더불어 이런 열악(?)한 곳에 마을이 들어섰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특이한 입지를 지녔다.

 

무섬마을 입향 조는 1666년 반남 박씨의 박수라는 분이 병자호란 후 피폐하고 가혹한 현실을 회피하고 은둔자적인 삶을 살고자 마을 첫 건축물에 해당하는 만죽재를 건립하여 터를 열었다고 한다. 지금도 외진 곳인데 그 당시라며 더욱 외딴 곳이었을 이곳을 찾아 터를 잡은 용기가 대단해 보였다. 병자호란으로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오직 은둔에만 신경을 쓰고 이곳을 찾아 왔을까 했다.

 

100여 년이 지난 후 선성 김씨의 김대가 그의 증손녀와 혼인하게 되면서 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무려 350 여 년을 한 곳에서 터를 이루고 이어오고 있다는 점도 대단하지만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섬마을 안내 리플렛 등에 나와 있기를 무섬마을은 풍수로 보면 매화꽃이 떨어진 모습을 닮은 매화낙지(梅花落地)형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형 모양의 지형이라고 한다.

 

명성과 덕망이 높은 자손이 많이 나온다는 양택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지금 마을 이름이 수도리(水島里)인데 수도리의 순수 우리말이 무섬이라고 한다. 원래는 물섬 이었다가 무섬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물섬 보다는 무섬이 훨씬 어감도 좋고 깊이가 느껴졌다. 내밀한 스토리가 무궁무진 담겨 있을 듯한 용어 선택이 탁월했다. 집단지성의 힘은 대단하다. 상황에 맞는 최적의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사고가 한 수 위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무섬마을 한옥 건축물(국가지정 민속 문화재)

 

무섬마을은 건축물들의 배치 간격이 다소 빽빽해 보일정도로 근접해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과 어우러진 전통 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곳으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구조와 크기를 지닌 전통 가옥이 많이 남아 있어 한옥을 연구하는 분들에게는 꽤 유용한 가치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했다.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있는 해우당(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92), 조선 현종 7(1666)에 지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인 만죽재(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93)등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정 시간이 없으시면 두 곳만이라도 꼭 둘러보고 가시길 권해 드리고 싶다. 두 건축물 모두 누마루 건축물을 지니고 있기에 당시에는 무척 고급스러운 건축물로 여겨졌지 않았을까 싶었다.

 

무섬마을에는 자 형태의 마당을 지닌 한옥이 많고 초가로는 강원 산골 등 추운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까치구멍집도 보였다. 자 형태의 마당은 경북 북부지방의 양반집 구조로 서울 지방에서도 가회동에 가면 자형태의의 한옥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도심지 한옥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원에 거주하는 경우는 사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형태의 집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자연과 교감하는 집인 한옥은 전원이 곧 자연이기에 내부로 자연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다.

 

도심지에서는 자연을 안마당에 들여 방에서도 수시로 자연과의 교감을 꾀할 목적으로 자연과의 소통 창구 역할을 했던 마당을 만든 성격이 강했다고 보면 된다. 경북지방의 양반집은 여유 있는 집에서 내밀함 속에서 자연을 즐기기 위해 추구하지 않았나 싶다. 까치구멍 집은 사실 우리나라 아파트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면 볼수록 독특하고 창의성이 돋보였다. 우리나라 전통 가옥은 자세히 살펴보면 비슷한 듯해도 전부 조금씩 차이가 있고 집마다 개성이 있기에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부의 정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집 주인의 남다른 개성 또한 다양성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될 듯싶다.

 

마을을 둘러보면 적은 인구와 아담한 숫자의 건축물로 인해 다소 쓸쓸해 보였지만 찾는 외지인들이 많아 마을 전체적으로는 활력이 넘치는 듯했다. 마을에 사는 주민들 대부분이 연로한 분들이 많아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계속 존속할 수 있을지는 예측이 되지 않았다.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을로 느껴져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삶이 힘들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관광자원으로 확대를 모색한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350년이나 한 곳에서 터를 잡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오고 있는 무섬마을이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망했다.

 

우리나라 문화유산 답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한국 전통 문화의 본질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듯하다. 문명이 발달한 나라 일수록 채움의 문화에 익숙하고 문화가 발달한 나라 일수록 비움의 문화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전통 문화의 본질은 비움에 있다. 얼핏보면 비움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살피면 오히려 비움과 절제의 문화가 근간으로 자리 매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려한 궁궐건축도 세밀하게 들어가면 최대한 절제를 원칙으로 하고 지어졌으며 백성들의 삶을 고려하여 건축에 반영 하였다는 것은 역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면 주지하는 사실이다.

 

사찰 건축과 일반 한옥 건축물 또한 다름이 아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너무 화려하거나 과도한 돈을 들여 짓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자연을 최대한 존중하고 자연을 거스리지 않는 건축을 원칙으로 삼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집 주인의 개성과 부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꼭 필요한 공간들만 들였다. 절제가 미덕이었고 선비의 삶 또한 그런 삶을 지향하려고 애썼다.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던 성리학도 그런 삶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남명 조식, 목은 이색 등 당대의 존경받았던 선비들의 삶은 비움과 절제 그리고 겸손을 삶의 철학으로 끝까지 지켜나갔다.

 

반면 유럽의 문화는 채움의 문화라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화려함과 더불어 채움 문화의 극치를 이루었고 그 문화의 뿌리가 지금도 남아 수많은 명품 브랜드로 계승되었다. 채움은 끝없는 욕심과 욕망을 부추기고 도달할 수 없는 경지까지 넘보며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결코 100% 만족은 불가능한 일이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물론 욕심, 욕망 그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욕심과 욕망이 있어야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허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비움과 절제에 익숙해져야 한다. 100년 도 못사는 인생임을 알면서도 대부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간다. 매일 후회하고 반성하면서도 비슷한 생활, 태도의 연속이다. 삶이 고해 일 수밖에 없다. 한국 전통 문화 속에 담긴 우리 선조들이 추구했던 비움과 절제의 정신을 이제라도 체화 시키고 본받으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워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욕심도 줄어드니 스트레스 또한 줄어 삶에 만족과 행복감을 주지 않을까 싶다. 말은 싶지만 비움에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아야 할지...

 

 

(2023.4)

 

 

성스러움과 신비함은 아주 평범하거나 그보다 못한 환경에서 나온다

(이근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