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17) 465
무섬마을 에필로그
무섬마을은 건축물들의 배치 간격이 다소 빽빽해 보일정도로 근접해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과 어우러진 전통 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곳으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구조와 크기를 지닌 전통 가옥이 많이 남아 있기에 한옥을 연구하는 분들에게는 꽤 유용한 가치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했다.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있는 해우당(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92호), 조선 현종 7년(1666)에 지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인 만죽재(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93호)등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정 시간이 없으시면 두 곳만이라도 꼭 둘러보고 가시길 권해 드리고 싶다. 두 건축물 모두 누마루 건축물을 지니고 있기에 당시에는 무척 고급스러운 건축물로 여겨졌지 않았을까 싶었다.
무섬마을에는 ㅁ자 형태의 마당을 지닌 한옥이 많고 초가로는 강원 산골 등 추운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까치구멍집도 많이 보였다. ㅁ자 형태의 마당은 경북 북부지방의 양반집 구조로 서울 지방에서도 가회동에 가면 ㅁ자형태의의 한옥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도심지 한옥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원에 거주하는 경우는 사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ㅁ자형태의 집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자연과 교감하는 집인 한옥은 전원이 곧 자연이기에 내부로 자연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다.
도심지에서는 자연을 안마당에 들여 방에서도 수시로 자연과의 교감을 꾀할 목적으로 자연과의 소통 창구 역할을 했던 마당을 만든 성격이 강했다고 보면 된다. 경북지방의 양반집은 여유가 있는 집에서 내밀함 속에서 자연을 즐기기 위해 추구하지 않았나 싶다. 까치구멍 집은 사실 우리나라 아파트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면 볼수록 독특하고 창의성이 돋보였다. 우리나라 전통 가옥은 자세히 살펴보면 비슷한 듯해도 전부 조금씩 차이가 있고 집마다 개성이 있기에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부의 정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집 주인의 남다른 개성 또한 다양성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될 듯싶다.
350년 전통의 무섬마을
까치구멍 집은 오래 전 회사 일로 알게 된 한옥 전문가이신 신영훈 선생께서 본인 저서에서 크게 강조하셨고 내가 뵐 때마다 내게 그 점을 수시로 말씀 하셨기에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까치구멍집의 특징은 모든 생활을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아파트처럼 부엌, 마루, 창고, 외양간, 방 등이 실내에 있도록 만든 집으로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 구멍을 내어 환기를 꾀한 집이다. 그 구멍으로 까치가 드나들었다고 해서 까치구멍 집으로 불려 왔다고 한다. 추운 지방에서 매서운 겨울을 고려해 모든 공간을 내부로 끌어 들였다고 보면 된다.
무섬마을의 또 다른 특징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양반과 농민이 함께 공부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의 본거지로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민족교육을 함께 실시했다고 한다. 양반과 상(농)민의 신분 차별에 앞장 섰던 점이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민족교육을 시켰던 점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시아 반도 내에 있는 수도리의 서당”이라는 뜻을 지닌 아도서숙(亞島書塾)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쳤던 애국마을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마을 면적 대비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마을로도 유명해 독립 유공자만 5명에 이른다고 했다. 무섬마을에는 농지, 우물, 담장과 대문 그리고 사당이 없다고 했다. 지형 특성상 마을 터가 크지 않아 작은 텃밭을 제외하고는 농사지을 땅이 없다고 한다.
풍수지리상 행주형으로 배가 구멍이 있으면 가라앉기 십상이어서 우물을 파지 않고 대신 강가에 구덩이를 파서 불순물을 가라앉혀 깨끗한 물을 얻었다고 한다. 담장과 대문을 만들지 않은 이유 역시 터가 충분하지 않아 그리 한 듯했다. 더불어 삼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어 수해가 자주 발생해 사당 대신 위패를 모시는 감실을 두었는데 이 역시 사당이 면적을 크게 차지해 그리 한 듯 보였다. 아무튼 크지 않은 터라 많은 제약이 있었기에 그 기준에 맞추어 지혜를 짜낸 듯했다. 한옥 건축물의 간격이 촘촘한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무섬마을에 와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블로그 등에서 눈여겨 본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에만 신경을 썼다가 실제로 와보니 본질은 다른 곳에 있었다. 350년 전통의 무섬마을이 앞으로도 오백 년, 천 년을 이어가는 영주의 대표 마을로 자리 매김 되길 간절히 간구했다. 새로운 콘크리트 다리가 생겨 외부와의 이동은 편리해졌지만 마을 고유의 안온하고 조용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진리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닌 듯했다.
(2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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