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12) 492
백제 왕조시기
왕릉원은 아담한 정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령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굴되어 겉은 평온 했지만 알맹이가 빠진듯하여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천만다행히도 무령왕릉은 도굴을 피해 1971년 발굴 당시 1,5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발굴되어 국내 학계를 비롯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최소 수 년 간에 걸쳐 천천히 발굴을 해야 함에도 무엇이 급했는지 수개월 만에 발굴을 종료한 것을 두고 역사학계에서는 아주 치욕적인 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1대 온조왕으로 부터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31명의 왕을 보유한 백제는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뉘어 진다. 한성 도읍기(온조왕-21대 개로왕, 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493년 존속지), 웅진 도읍기(22대 문주왕-24대 성왕, 475-538년 /63년 존속), 사비 도읍기(26대 성왕-31대 의자왕, 538-660년 /122년 존속) 이 정도는 상식으로 알아두셨으면 한다. 475년 고구려(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와신상담(臥薪嘗膽) 했을 백제의 고뇌가 느껴졌다.
한때는 근초고왕 시절 고구려 평양성을 공략해 고국원왕을 죽이고 승리를 만끽 할 때도 있었지만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도읍지를 내놓고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 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은 평생의 한으로 남았을 것이다. 백제왕조는 왕들의 재위기간이 길지 않다. 왕권의 강화는 시스템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법인데 그러하지 못했다. 고대국가가 기틀을 제대로 잡기까지는 상당한 시간도 필요하지만 한편으론 리더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다.
백제의 왕권강화는 귀족들의 견제와 지방호족들의 발호로 인해 늘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 되었다. 백제의 많은 왕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왕권은 바람 앞에 촛불의 신세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권이 확립된 강력한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형성되기 전 혼란한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귀족들의 욕심과 욕망은 왕권을 무력화 시키는 가장 큰 변수였다고 했다.
(2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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