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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6) 505 도천사지 석탑

(김천 6) 505

 

도천사지 석탑

 

비로전 앞 마당의 삼층석탑 또한 대웅전 앞 마당의 삼층석탑과 같이 문경 도천사지에서 옮겨온 석탑이다. 도천사지의 3개의 삼층석탑을 직지사로 모두 모셔온 격이 되었다. 3개의 석탑으로 인해 직지사가 안정을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로전에서 멀지 않은 곳 성보박물관 후면에 있는 삼층석탑이 예사롭지 않았다. 석탑 설명문을 보니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으로 1980년에 직지사로 옮겼다고 한다.

 

도천사지 석탑과 같이 통일신라 석탑으로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단층기단의 폭이 조금 더 넓어 안정감이 느껴졌다. 석탑을 만든 석공의 기술력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석탑이 놓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전각(건축물)의 크기와 배치 형태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에 무턱대고 좋다, 나쁘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불교가 한반도에 도래된 초기 사찰에서는 석탑은 금당(부처를 모신 전각)이라고 일컫는 대웅전 앞마당에 거대한 크기로 자리 잡았다가 통일신라이후 점차 작아졌다고 한다. 이는 탑보다는 불상을 모신 금당이 중요시 되고 탑은 부수적인 존재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불어 초기 사찰의 경우 탑의 기단 폭을 사찰 평면배치의 기준 단위로 삼았다가 쌍 탑식 가람에서는 탑과 탑 사이의 간격을 기준 단위로 하여 사찰 전반적인 건축 계획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사찰을 방문 할 시 참고 하셨으면 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 한 이후 고려왕조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설정하여 고려 초부터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고려조의 사찰은 통일신라시대 불교 건축을 능가할 정도로 화려한 것이 특징이니 사찰 방문 시 그 점을 유심히 살펴보시면서 감상하시면 시대별 차이점을 챙겨보는 즐거움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임진왜란 등의 수많은 병화로 중건, 중창 된 조선시대 건축물이 다수지만 중건 시는 기존의 형태를 가능한 따르려고 노력했기에 시대별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23.8)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