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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 3) 524 언양 성당 2

(언양 3) 524

 

언양 성당 2

 

언양 성당은 고딕식 형태로 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이다. 석재는 성당 뒷산에서 채취한 화강암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외국인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지은 성당이라고 하여 성당 건축물을 다시 천천히 살펴보았다. 거의 100년 가까이 되어가는 건축물임에도 보존 상태가 좋았고 그 당시의 설계기법이 탁월하게 느껴졌다. 모든 면에서 지금과 비교해 열악한 환경에서 지은 건축물임에도 대단한 공력을 들인 건축물로 다가왔다. 석재의 재질이 단단한 것도 한몫을 하고 있지만 6.25 동란을 잘 극복하고 훼손됨 없이 남아 있는 것은 성령의 가호가 있지 않았나 싶었다.

 

언양 성당은 또한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부산교구 내에서 가장 많은 5개의 공소를 둔 본당으로 순교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 경상남도 일대의 신앙의 뿌리가 되고 있다고 했다. 성당과 신앙유물 전시관은 200494일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마침 방문 하였을 때는 신앙유물 전시관 문이 닫혀있어 내부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시절 언양 지역은 경남지방에서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곳으로 박해시대에는 신자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부터는 산 속에 숨어 신앙촌을 이루며 살던 신자들이 마을로 내려와 여러 공소를 형성하고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언양 성당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꽤 많은 양의 교회관련 내용 중 한국 천주교회의 태동 배경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발췌하여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한국 천주교회의 태동

 

상식으로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모르는 분을 위해 약식으로 서술해본다. 한국천주 교회의 태동 배경과 역사의 전개과정을 통해 역사는 반복되며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 후기에 발생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그 이전에도 심각한 상태에 있던 사회 여러 분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를 급속히 붕괴시켰다. 양반이 몰락하고 전란의 과정에서 노비의 도망과 해방으로 노비의 수가 격감함으로써 양반과 천민의 구분조차 모호해 졌다고 한다. 한 마디로 경제, 사회적 기존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근대시대로의 태동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당시의 정치세력은 여러 분야에 걸쳐 발생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고 개혁하기 보다는 자신들에게 보장되었던 특권에 안주하여, 경직되고 보수적인 통치 질서를 유지하고자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정치상황을 연출하였고 이에 따라 왕권은 점차 약화되어갔고 조선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도 점차 힘을 잃었다. 성리학은 본래 우주 만물의 존재와 생성을 밝히는 관념적 철학 사상인 동시에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도덕규범과 관련시켜 그 실현()을 요구하는 실천적 학문이었다.

 

즉 성리학에서의 모든 인간관계는 충과 효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수직적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더불어 명분론을 내세워 누구나 그 직분이나 신분에 있어서 ''에 넘치는 행위는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한 반면 지배 계급인 양반층의 정통성과 봉건적 신분 질서의 확립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지어미, 주인과 노비 그리고 양반과 상민 사이의 지배 예속 관계가 절대시 되었고, 그러한 관계를 밝히는 가르침으로서 삼강오륜이 사회 규범으로 권장되고 교육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적 질서는 봉건 사회의 모순이 심히 노출되고 있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변화를 꾀하지 못하고 더욱 강조되어 양반과 상민, 양민과 천민이 각기 엄격히 구분되고, 신분에 따른 질서가 법제화 되었으며 주인과 노비와의 관계는 군신, 부자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엄격히 고수되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은 그 자체의 변화와 혁신을 싫어하는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유지하고자 봉건적 의례를 강요함과 동시에 혈연 집단의 유대를 통해서 문벌을 형성하고 그 바탕 위에서 양반으로서의 신분의 우위성을 유지하고자 노력 하였다.

 

한편으론 임진 ,병자 양란으로 인해 봉건 사회가 점차 해체의 길을 밟아가게 되자 성리학적 질서의 구조적 모순이 점차 드러나게 되고 해체와 유지의 계층 간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당시 백성들은 전란의 후유증과 정치의 부패 그리고 재난이 가중되면서 생활고에 신음하고 있었지만, 성리학은 그러한 현실에 적절히 대응할 사회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2023.8)

 

꽃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무엇을 이루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피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 나 자신도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꽃처럼 아름답다

(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 준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