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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여행기,수필

(상주 9) 539 도남서원

(상주 9) 539

 

도남서원

 

도남서원은 상주보 가는 길가에 있다. 상주보로 인해 거대한 호수가 된 낙동강을 전면으로 바라보는 얕으막한 언덕에 위치했다. 차가 다니는 도로변에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는 없었지만 낙동강이 잘 바라보이는 위치에서 자신의 존재를 기품 있는 자세로 알리고 있었다. 한창 잘 나갔던 도남서원이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다시 복원해서 인지 어딘지 모르게 전체적으로 빈약한 느낌과 더불어 건축물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있는 듯했다.

 

건축물은 모두 하나같이 여느 서원에 비해 규모가 있었고 차지하고 있는 면적도 제법 컸지만 공간배치가 자연스럽지 않고 경직된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엉성했고 짜임새 있는 배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잘 생긴 건축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고 홀로 당당한 모습이 어딘지 어색했다.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솟을삼문 형식의 입덕문(入德門)은 바로 도로변이어서 늘 닫혀있고 좌측으로 난 작은 쪽문인 영귀문(詠歸門)이 정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정허루(靜虛樓) 누각은 규모도 있고 잘 지은 건축물이지만 누각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조금 산만한 풍경에 잠시 실망했지만 현대에 이르러 주변의 풍광이 달라졌기에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도남서원은 1606(선조 39)에 창건하였고, 1676(숙종2)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나, 1871(고종8)에는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는 아픔을 거쳤다. 향토 유림에서 1992년 복원에 착수하여 4년간의 역사 끝에 강당 등을 일부 복원하였고 2002년부터 2년에 걸쳐 유교문화권 정비사업으로 정허루 등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모두 30년 채 되지 않은 건축물인데 아주 오래전에 지은 건축물로 여겨졌다. 본디 한옥 건축물은 사람이 직접 살면서 관리해야 오래 가는 법인데 무척 아쉬웠다. 동재(손학재,遜學齋)와 서재(민구재,敏求齋)의 편액 글씨에 담긴 뜻이 심오(深奧)했다.

 

오랜 시간의 더께가 쌓인 곳인데 최근 지은 건축물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거의 방치 상태로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허술했다.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과 대비 되었다. 도남서원은 조선의 유학 전통은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탄생한 서원으로 포은 정몽주,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선생, 창석 이준, 서애 유성룡, 우복 정경세 선생, 소재 노수신 선생 등 총 아홉 분을 배향하고 있다. 인물들 면면을 보면 영남 최고의 서원으로 불러도 될 듯했지만 모든 것이 아쉬움 그 자체였다. 전통의 복원은 세심한 기획과 고증 그리고 관리가 무척 중요함을 다시 한 번 새겼다.

 

도남(道南)’이란, 글자는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오늘날의 모습은 심히 부끄러운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었다. 조선시대 당시 낙동강에서 안동으로 올라가는 소금배도 서원 앞을 지날 때는 돛을 내려야 했을 만큼 위상이 남달랐던 도남서원, 지금부터라도 도남서원을 어떤 모습으로 보존하고 관리 할 것인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낙강범월시유래비(洛江泛月詩由來碑)

 

도남서원 정문 앞에 서있는 낙강범월시유래비(洛江泛月詩由來碑)가 도드라졌다. 어정쩡한 위치에 있어 무심코 지나쳤으나 해설사분 이야기를 듣고는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선비를 자처하는 문인들이 고려 말부터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시작(詩作)을 하는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한다. 시회의 역사가 무려 600여 년이나 될 정도로 선비들에겐 일반적이면서도 무척 중요한 행사 였던 모양이다. 자신이 갈고 닦은 학문을 동료 문인들에게 시작(詩作)으로 알리는 자리이니 체면을 중시하고 자존감이 강했던 선비들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아주 치열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도남서원에서는 낙성 이듬해인 16079월 처음 배를 띄워 시회를 가졌다고 한다. 1607년 첫 시회부터 정조 2년인 1778년까지 171년 동안 8차례 개최되었다고 하는데 그때의 시회 이름이 '낙강범월시회'라고 한다. 낙동강에 달을 띄워 놓고 시를 짓는다는 의미인데 한마디로 대단하고 거창한 풍류가 느껴졌다.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시를 읊었던 흥취는 지금도 도남서원에서 매년 개최되는 낙강시제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시작 내용을 한 번 찾아보고 옛 선조들의 풍류와 기개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시간 상 내일을 기약했다. 경치 좋은 곳이면 의례히 시작을 통해 풍류를 읊고 가슴에 맺힌 것들을 풀어 놓음으로써 스트레스를 풀었던 선비의 삶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자연(自然)은 늘 그러하듯 모든 것을 품고 역사의 조연이자 주연으로 오늘도 스스로 그러했다. 문학의 본질 중 하나는 낯익은 것(언어, 사고 등)을 새삼스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익하고 여행은 낯설음을 통해 삶을 새삼스럽게 돌아보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닮은 듯싶었다. 일상에 함몰되는 삶을 피하기 위해서는 독서와 여행이 중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했다. 상주보로 인해 조성된 거대한 낙동강 호수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23.10)

 

삶의 성취는 자신에 대한 확실한 신뢰에서 비롯된다(지수스님, 마음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