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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6) 551 컨츄리 와인(와이너리) 2

(영동 6)  551

 

컨츄리 와인(와이너리) 2

 

한춘희씨는 8,9월 포도 출하시기에 단체로 오면 직접 와인 만들기 체험과 포도즙 맛보기 등을 할 수 있으니 꼭 한 번 찾아오기를 권유했다. 와이너리 탄생 과정이 궁금해 질문을 드렸다. 사연을 간단히 요약하면 시아버님 되는 분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군에 강제 징용되어 서태평양의 마크로네시아에서 작전 중 포로가 되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우연히 스페인 병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이 알려준 포도의 효능과 와인 만드는 법등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온 시아버님은 공직생활(황간면사무소)을 마치자마자 고향 주곡리에서 첫 포도나무를 심고(1965) 본격적으로 포도 농사에 돌입하게 되었는데 그 후 재배한 포도를 포도주로 담가 이웃들과 자주 나누어 드는 것을 큰 낙으로 삼으셨다고 한다. 그 사이 한춘희씨는 며느리로 이곳에 오게 되었고 와이너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동기는 한반도에 큰 피해를 입혔던 태풍 루사, 매미로 인해 포도 농사를 망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연이어 태풍피해를 당하자 상품가치가 없는 것을 버리지 않고 전량 수거하여 이를 포도주로 만들어 이웃과 나누고 일부는 팔게 된 것이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8년간의 오랜 우여곡절을 겪은 후 주류제조면허도 취득하고 컨츄리와인 이라는 브랜드도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 지금은 대표이사로 큰 아들이 경영, 판매, 마켓팅을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가족사진을 보니 남편 분을 비롯해 아들 또한 인상이 선하고 착해 보였다. 큰 욕심을 내지 않고 가내수공업 개념으로 소량(?) 생산, 판매하며 전원생활을 겸하며 사시는 듯했다.

 

내가 보기에 개략 일 년 매출은 14,5억 정도는 되는 듯 보였고 그 이상 생산, 판매하려는 욕심은 없으신 듯했다. 생산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리스크도 커지고 여유로운 시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아신 듯했다. 대구가 고향인 한춘희씨는 도시 처녀로 현재 남편을 만나 연애 중 우연히 남편 고향인 주곡리 과수원에 놀러왔다가 보라색, 흰색 도라지꽃이 만발한 과수원에 홀딱 반했고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 송이송이 익어가는 풍광에 매료되었다고 하시며 이곳에 오게 된 인연을 이야기 했다.

 

도시 처녀가 영동 주곡리로 시집와 현재의 와이너리리를 일군 노력과 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광양 매실 농원의 홍쌍리 여사가 연상되었다. 억척스러운 면은 남자보다 여자가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 생산 방식에도 차별화된 특징이 있었다. 와인에 자연 생명력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기계나 필터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침전방식을 사용하고 병입 단계에서 보통 사용하는 산화방지제인 무수아황산을 비롯해 합성첨가물과 보존료 등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멸균 방식으로는 파스퇴르 우유 생산 방식인 저온처리 방식만을 사용하는 100% 내츄럴 수제 와인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이 와인이 생애 첫 와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인자함과 친절한 성품 그리고 올곧은 심성을 지닌 듯한 태도와 표정에서 그 분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각 종 와인 품평회에서 수상 경력도 다양하고 소량이지만 100% 자연방식으로 생산, 공급한다는 자부심이 읽혀졌다. 45년간 3대를 거쳐 이어오며 짓고 있는 포도 농사와 영동와인을 대표하는 컨츄리와인이 국내 최고 와인의 하나로 자리 매김하기를 응원했다. 서울에서 이 먼 곳까지 찾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우리에게 전하면서 꼭 다시 체험으로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는 인사에서 따뜻함과 애정이 느껴졌다. 부디 늘 건강하시고 맛 좋은 와인 오래도록 생산해 주시길 기원해 드렸다.

 

(2023.11)

 

탁월한 장수는 자신의 운명을 불확실한 행운에 의지하지 않는다(김상근, 군주의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