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16) 567
팔영산 에필로그
외국인 일행은 능가사 방면을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해 조금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젊은이들 특유의 체력으로 잘 이겨내지 않을까 싶었다. 몸조심해서 안내 산행 잘 마치라는 덕담을 남기고 우리는 능가사 방면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유영봉에서 능가사 날머리까지는 2.2km 정도여서 30분 남짓 걸렸다. 하산 길은 편안 했다. 경쾌한 행진곡 풍의 음악을 듣고 난 후의 편안한 마음으로 천천히 하산 하는 이 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감정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아났다. 등산이 주는 독특한 매력이자 마력이다.
능가사 근처 능선까지 거의 다 내려오자 막 피기 시작한 진달래가 화사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후 화사한 웃음꽃으로 우리를 전송했다. 1주일 정도면 이곳은 진달래 꽃 대궐을 이룰듯했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잿빛의 나무들은 가지 끝마다 잎을 틔우기 위한 준비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주 서서히 움직이는 생명의 손짓으로 보이지만 어느 순간 폭발하는 듯 동시에 작은 잎들을 화사하게 펼칠 것이다. 잿빛이 연녹색으로 변하는 절정의 순간이 곧 계절의 변곡점을 알리는 신비의 순간이자 창조주의 존재가 물씬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산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대 자연과 비교하면 한 없이 나약하고 변변치 못한 인간을 창조주께서 한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광은 창조주께서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베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고 한동안 숨죽이고 있던 자아가 대 자연을 만나는 순간 자연과 서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느낌을 받는 건 혹여 나만의 느낌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팔영산 산행을 마치고 능가사 대웅전이 있는 뒤쪽 공간으로 진입하여 능가사 전체를 둘러보게 되니 예전에 왔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3년 전 방문 때도 마침 이맘때쯤 이었는데 그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론 큰 산에 머물다 와서인지 능가사가 아주 왜소해 보였다. 대웅전 외 여타의 전각들은 거의 존재감이 들지 않았다. 일주문과 대웅전 사이 넓은 공간 한 가운데 능가사 규모에 맞지 않는 커다란 전각이 새로 들어섰다.
조금 쌩뚱맞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른 전각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부끄러운 듯 서있었다. 넓었던 대웅전괴 일주문 사이 공간이 쪼그라들어 능가사 전체를 천둥벌거숭이 같은 모습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웅전 앞 공간은 그대로 살리고 신축 전각을 다른 공간에 들였으면 어땠을 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대웅전 앞마당에 마지막 꽃들을 떨꾸고 있는 동백이 겨울을 보내는 것을 아쉬워하는 듯 애처로이 서 있었다.
한 때는 송광사와 더불어 호남 4대 사찰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 매김하며 40여 개의 암자를 거닐었던 능가사가 팔영산의 영험한 정기를 받아 다시 예전의 사세를 크게 펼치길 간구했다. 그러려면 더욱 마음공부에 전력투구하는 수행도량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영험하고 기운 좋은 팔영산이 도와주고 있으니 예전의 능가사로 제 모습을 갖추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이 원을 세우면 부처님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돕는다는 옛 말이 있지 않은가? 능가사를 떠나기 전 고흥의 진산 팔영산을 대웅전 앞마당에서 다시 바라보았다. 아담한 8개의 봉우리가 마치 형제애를 자랑하듯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3월 말 이곳을 찾은 우연에 감사했고 함께 한 일행들이 있어 행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은 좋은 삶(eudaimonia,에우다이모니아)에 있다고 했다. 좋은 삶에 대한 번역이 다양한데(행복, 번영 등) 내가 보기엔 품격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작은 의미로는 상대방을 먼저 인정해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절제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크게 보면 어떠한 주제든 극단에 휩쓸리지 않고 중용을 유지하며 너그러움을 바탕으로 한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 싶다. 정치든 사회생활이든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닥치는 모든 상황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는 삶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삶의 목적을 좋은 삶에 둔다면 스스로 품격 있는 삶을 지향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팔영산이 내게 전하는 말이 이것이 아닌지 싶었다.
(2024.3)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그를 바탕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다
(한정주, 율곡, 사람의 길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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