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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3) 449 한개 마을 1

(성주 3) 449

 

한개 마을 1

 

성주군 월향 면에 위치하고 있는 한개 마을은 영취산(322m)의 품안에서 안온했다. 남향받이에 세운 전통 민속마을로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안동 하회 마을과 경주 양동 마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규모는 작아도 마을을 이루고 있는 전통 가옥 하나하나 개성이 넘쳤고 상류층 가옥과 서민 가옥이 골고루 혼재되어 있어 한옥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무척 유익하지 않을까 했다. 600여 년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 가까운 일이지 않을까 싶었다.

 

한개 마을은 너무 오래되어 손볼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아직도 주민들이 직접 거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전국의 오래된 마을을 방문 할 때마다 늘 아쉬운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600여 년 전에 조성된 마을이라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충분 하거니와 옛 선조들이 살았던 주거 형태를 계승 보존하고 수리하는 일 자체도 매우 중요한 일임에도 그냥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관리 상태는 엉망인 것처럼 보였다. 개인의 사유재산이기에 소유주의 몫이라는 고루한 생각이라면 차제에 시각을 바꾸어 전통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차원으로 승화 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3km 정도 되는 고샅길 담장이 아주 운치가 있었다. 낮으막한 구릉지에 조성된 마을이어서 각 가옥의 마당에서 전면을 바라보는 시야가 대부분 터져 있어 개방감이 단연 좋았다. 담장은 너무 오래되어 수리가 필요하고 손 볼 곳이 많았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고즈넉한 고샅길은 오히려 쓸쓸하기까지 했다. 양지바른 터가 쓸쓸한 분위기를 잠재워 주고 있었다. 인기척 없는 가옥들을 둘러보면서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나이 드신 분들만 남아 있는 듯했다.

 

대가족을 이루어 살던 가옥 들이 이제는 노인 부부 내외 정도만 살고 있어 모든 가옥들마다 허전함과 쓸쓸함이 묻어났다. 현대인들에게는 전통이란 한 낮 고루하고 불편한 것으로 치부되는 현실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듯했다. 한개 마을은 세종 조(1450년 무렵)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라는 분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입향 시조가 되었고 세월이 흘러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성산 이씨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17세기 이정현이 문과에 급제한 이후 33명이나 되는 많은 인물이 과거에 합격할 정도로 이름을 널리 알려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마을로 회자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번성하였을 때는 100여 채가 넘는 마을 이었으나 지금은 60여 채 정도가 남아 있다고 했다.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은 터가 주변에 있는 다른 마을과 비교해 유난히 돋보였다.

 

(2021.10)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느낄 때는 사랑, 선행, 봉사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를 구현 할 때다(차동엽, 무지개 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