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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2) 469 송광사 2 (약사전과 영산전)

(순천 2) 469

 

송광사 2 (약사전과 영산전)

 

송광사는 대찰답게 전각들이 엄청났다. 53개가 넘는 전각들이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빼곡했다. 송광사는 참선수행과 경전을 교육 시키는 강원과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을 모두 갖춘 총림으로 제대로 살펴보려면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전각들은 많았지만 다행히 핵심공간인 대웅전 앞마당이 넓어 답답하진 않았다. 앞마당에 심어져있는 배롱나무가 텅 빈 공간을 안온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국보와 보물들이 많은 사찰답게 건물들의 보존 상태가 좋았다. 대웅보전 앞마당에 있는 약사전과 영산전이 독특했다. 약사전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 부처를 모신 전각인데 사방 1칸으로 된 작은 건축물로 대들보 없이 공포만으로 천장을 구성하고 있어 특이했다.

 

두 건축물 모두 크진 않았지만 옹골찼다. 일반적인 건축물이 아니어서 보물로 지정한 듯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와 부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대회탱과 부처의 일대기를 표현한 팔상도를 모신 전각으로 약사전보다 건물이 컸다. 두 전각 건축물이 비슷한 모습으로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두 건물 모두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았다. 대웅보전에 석가모니 부처를 모셨는데 영산전에도 크기는 작았으나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것이 의아했다. 대찰이다 보니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전각이 하나 더 필요해서 세우지 않았나 싶다.

 

국보로 지정된 국사전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사찰에서 일을 보시는 분께 여쭈니 지금은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국사전은 승보 종찰에 걸맞게 송광사에서 배출한 16명 국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송광사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사진으로나마 보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영산전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우화각과 사자루가 있는 공간이 송광사의 가장 돋보이는 공간이다. 작은 하천 변에 세운 우화각과 사자루는 송광사를 소개하는 사진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건물답게 수려했다. 사찰 건물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지만 우화각과 사자루가 있어 딱딱한 사찰 건축물에 다소나마 온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었다.

 

송광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 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였고 100여 칸이 넘는 절로 30, 40명이 거주하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이후 보조국사 지눌 스님(1158-1210)께서 9년간의 중창불사(명종 27, 1197- 희종원년, 1206)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불교 정화운동인 정혜결사 운동을 주도하여 수많은 대중을 교화, 지도하며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고히 하였다고 한다. 이후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수많은 난과 6.25 동란 등을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오늘날의 대가람으로 변모하여 대한민국 제일의 승보 종찰로서 단단히 자리 매김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 사찰은 한국 미술의 보고에 가깝다. 건축뿐만 아니라 조각, 회화 등을 모두 사찰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제대로 감상하려면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국보와 보물 등을 많이 간직한 이름 난 사찰이라면 더욱 그렇다. 볼 것도 많지만 서로 비교하며 볼 수 있기에 여러 사찰을 다닌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안목은 그런 과정을 거쳐야 생긴다. 휙 둘러보고 가서는 그런 안목을 결코 만들 수 없다.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시간을 가져 보시길 권해 드린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보는 안목은 점차 높아 질 것이다.

 

(2021.10)

 

서로의 개성과 자유를 포기하고 그 대가로 얻은 안정을 지키려는 성향은 개인뿐 아니라 조직전체를 괴사시키는 주범이다(김경집, 인문학자 김경집의 61 사고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