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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여행기,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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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3 ) 593 씨족 마을 (경주 3 ) 593   씨족 마을    처가입향(妻家入鄕)으로 맨 마지막에 들어온 경주(월성) 손씨와 여강(여주) 이씨 두 개의 성이 유교적 질서를 으뜸으로 두고, 또한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하기 시작하면서 시가입향(媤家入鄕)으로 굳어 졌다고 한다. 두 개의 성을 중심으로 한 집성촌이 약 500 여 년 이어오고 있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고 우리나라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오래도록 보존해야 할 마을이 아닌가 싶었다. 양동 마을은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씨족마을의 가장 오래된 사례 중 하나라고 했다.   양동 마을은 씨족 마을(집성촌)인 동시에 양반세거지로서, 두 성씨의 양반가와 이들을 보필하는 노비들이 공존하는 형태였다고 한다. 기와집 아래 보이는 초가집이 그들의 주 거주지 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
(경주 2) 592 500년을 이어 온 마을 (경주 2)  592   500년을 이어 온 마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답게 5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느낌이 들었다. 세계문화유산이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잘 구현하고 있는 사례이기에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세계문화 유산으로 선정되지 않았나 싶었다. 하회마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행이 다녀갔고 양동마을에는 영국 찰스 황태자가 다녀갔다고 하는데 한국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하는 영국이란 나라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분야든 가리지 않고 본질을 추구하는 나라가 선진국임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500여 년의 오랜 역사의 켜가 쌓여 있는 양동 마을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싶지 않았다. 전반적인 느낌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
(경주 1) 591 양동(良洞) 마을 (경주 1)  591   양동(良洞) 마을    어진 선비가 산다는 의미를 담은 경주 양동 마을은 안동 하회 마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마을이다(2010.7). 10여 년 전 처음 찾은 이후 경주에 갈 때마다 꼭 다시 한번 방문해야지 하다가도 번번이 놓치고 돌아서곤 했다. 경주는 워낙 볼 곳 많은 지역이어서 늘 시간이 부족했다. 2024년 3월 동생네 가족들과 경주여행을 계획하고 양동 마을을 최우선으로 찾았다. 둘째 동생 제수씨가 경주가 고향이어서 봄맞이 여행으로 경주와 울진을 둘러보기로 하고 경주 역에 내리자마자 렌트카를 이용, 동생네 가족 일행과 함께 찾았다. 둘째 동생 내외도 이곳을 알기만 했지 제대로 둘러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구례 10) 590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 (구례 10)  590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    화엄사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가 무척 많았다. 대웅전 불상인 화엄사 목조비로자나 삼신불좌상을 비롯해 영산회괘불탱,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적멸보궁의 사사자삼층석탑, 각황전 앞 석등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을 비롯해 화엄사 서오층 석탑과 동오층 석탑 등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오래된 예술작품의 보고로 느껴졌다. 10여 점 이상의 국보,보물이 있는 사찰은 많지 않기에 화엄사의 격이 더욱 높게 느껴졌다.   화엄사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주지 덕문 스님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시대 흐름에 부합하고, 더 역량 있고,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발전하는 화엄사를 만들어야 한다며 6 가지 과제를 목표로 내 걸었다. 그 중 눈에 띈 것 3가지는 본•말사 상생..
(구례 9) 589 화엄사 홍매 (구례 9)  589   화엄사 홍매    화엄사의 핵심공간을 둘러보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지만 화엄사의 전각뿐만아니라 배치 등에 적용된 치수(모듈)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박사 논문 정도는 거뜬하지 하지 않을까 했다. 사람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안정감과 장중함을 주는 바탕에는 수치의 비밀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했다. 매년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 화엄사는 오늘은 만개한 화엄사 홍매를 보기 위해 찾은 사람들이 더해져 무척 붐볐으나 시장 장터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사찰의 규모도 크고 홍매를 사진작가들처럼 오랫동안 보는 사람들은 한정되고 대부분 20여 분정도 사진을 찍고 감상하다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100% 만개한 홍매는 아니었지만 오래된 전각들 사이에 핀 홍매는 한마디로 화려했고 애잔했다..
(구례 8) 588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적멸보궁 (寂滅寶宮) (구례 8)  588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적멸보궁 (寂滅寶宮)    각황전(覺皇殿)에 담긴 뜻이 깊었다. 부처님이 깨달은 황제라는 뜻과 숙종 임금께 불교사상을 일깨워 주었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오래된 것은 물론 보기에도 웅장하고 건축기법도 탁월해 국보로 지정된 듯했다. 각황전 뒤편에 있는 적멸보궁은 이번에 처음 찾았다. 늘 시간에 쫓겨 각황전과 대웅전 정도만 살펴보고 돌아섰는데 이번에는 화엄사를 제대로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찾아서 그런지 눈에 들어왔다.   부처의 진신 사리를 73과나 봉안 하고 있어 아마도 우리나라 사찰 중 통도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진신 사리를 봉안 하고 있는 사찰이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 있는 4사자 삼층석탑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일반 탑과는 확실..
(구례 7) 587 화엄사 보제루(普濟樓) (구례 7)  587   화엄사 보제루(普濟樓)   화엄사 핵심공간의 하나인 보제루(普濟樓)가 당당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큰 건축물로 비례미가 탁월했다. 창문의 형태가 특히 아름다웠다. 한 마디로 잘생겼다. 부처의 법문을 들려주어 많은 사람을 제도하는 법요의식(法要儀式)을 하는 장소이지만 보제루의 역할은 또 하나 있다. 핵심공간을 전반적으로 안정감 있게 잡아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각황전과 대웅전의 존재감을 부각시켜 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 듯했다. 보제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화엄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줄 정도로 크지 않을까 했다.   각황전과 대웅전의 규모를 고려하여 보제루의 크기도 정한 듯싶었다. 내 주관적인 판단이므로 그냥 참조 하셨으면 한다. 핵심공간이 있는 앞 마당에 들어서면 두..
(구례 7) 586 벽암 각성 대선사(1575-1660) (구례 7)  586   벽암 각성 대선사(1575-1660)    일주문 지나 대웅전 가는 길 우측,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커다란 비가 있는데 이 비가 바로 벽암 각성 대선사비(벽암국일도 대선사비)이다. 대부분 모르고 지나친다고 하며 해설사께서 안타깝다고 했다. 화엄사를 비롯해 해인사, 법주사 등의 큰 사찰 중수에 큰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했다. 아울러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에는 승병을 이끌고 참전하여 불교계의 위상을 드높이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화엄사 중창과 오늘의 화엄사를 만든 중요한 인물임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는 불손함이 죄송스러웠다.   화엄사를 비롯해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들이 세월의 켜가 중첩되고 다양한 사건 사고를 격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고 신비할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