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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16) 496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 유적지구 (공주 16) 496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 유적지구 2015년 7월 공주의 공산성과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비롯한 부여·익산의 백제유적 8곳이 ‘백제역사 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는 중국과의 교류를 기초로 백제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구축하고, 이를 일본 등 주변국가에 전파하여 고대 동아시아 문화 번영에 기여한 점이 높게 평가되어 세계인의 유산이 된 것이라고 했다. 특히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 웅진시기(475~538년)의 왕릉군으로서 무덤의 구조와 유물 등이 백제문화의 우수성과 고대 동아시아와의 밀접한 문화교류를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중국 선진 문명을 받아 들여 이를 백제만의 독창적인 문화로 만들고 이를 일본 등에 전하여 홍익인간의 정신을 ..
(공주 15) 495 일본국과 무령왕 (공주 15) 495 일본국과 무령왕 일본 규슈 북쪽에 위치한 섬 가카라시마에서는 매년 ‘무령왕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무령왕의 치적 보다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로 더 잘 알려진 무령왕을 되새기는 축제라고 한다. 가카라시마와 나고야성 박물관이 속한 사가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와 교류해왔는데 가카라시마는 무령왕의 생모가 왕의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가던 도중 그를 낳은 장소라고 한다. 무령왕의 본명인 ‘사마(斯麻)’는 바로 가카라시마라는 지명의 일부인 ‘시마(島, 일본어로 섬을 의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백제시대 이후로도 교류가 지속된 한일역사는 앞전에서 말한 대로 임진왜란을 맞아 전쟁과 약탈의 역사로 바뀌는 안타까운 시기를 맞았다. 약탈한 조선 도자기와 도공들의 흔적은 사가현 곳곳에 무..
(공주 14) 494 공주 국립박물관, 무령왕릉 (공주 14) 494 공주 국립박물관, 무령왕릉 공주 국립박물관은 무령왕릉 발굴로 인해 만들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부장품이 엄청났다. 부장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령왕이라는 인물의 발굴이었다. 무령왕을 통해서 백제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부장품을 통해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1,5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발굴되어 그 당시의 생활상을 비롯해 화려하고 세련된 유물을 통해 그 당시 백제 인들의 미 의식과 수준 높은 공예 기술 등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지석이 함께 발견되어 무령왕의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어 고고학 편년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 장식, 금제 귀..
(공주 13) 493 백제 25대 무령왕 1 (공주 13) 493 백제 25대 무령왕 1 난세에는 늘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다. 웅진 천도시기에 25대 무령왕이 등장함으로써 쇠락해가는 백제왕조의 기틀을 잡았다. 그는 준비된 왕이었다. 내치에 혼신의 힘을 쏟았고 중국과의 외교에도 공을 들였다. 일본과의 관계는 전략적 동반관계로 발전 시켰다. 오래 전 왕인박사를 통해 천자문과 논어를 전수 해주었던 백제이기에 일본이 백제를 대하는 태도는 남달랐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조선과 왜는 상호교류를 통해 긍정적인 시그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왜구의 발호는 왜 또한 어찌 할 수 없었던 점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거대한 야망이 조선을 향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후로 조선과 왜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그 흑 역사가 계속 ..
(공주 12) 492 백제 왕조시기 (공주 12) 492 백제 왕조시기 왕릉원은 아담한 정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령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굴되어 겉은 평온 했지만 알맹이가 빠진듯하여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천만다행히도 무령왕릉은 도굴을 피해 1971년 발굴 당시 1,5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발굴되어 국내 학계를 비롯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최소 수 년 간에 걸쳐 천천히 발굴을 해야 함에도 무엇이 급했는지 수개월 만에 발굴을 종료한 것을 두고 역사학계에서는 아주 치욕적인 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1대 온조왕으로 부터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31명의 왕을 보유한 백제는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뉘어 진다. 한성 도읍기(온조왕-21대 개로왕, 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493년 존속지), 웅진 도읍기(2..
(공주 11) 491 무령왕릉과 왕릉원 1 (공주 11) 491 무령왕릉과 왕릉원 1 공주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 중의 하나가 무령왕릉이다. 백제에 대한 지식이 짧은 사람도 무령왕릉을 보고나면 백제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고대국가의 하나였던 백제의 역사는 자그만치 거의 7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한 왕조가 700년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주박물관을 둘러보고 무령왕에 대한 지식을 피상적으로나마 머리 속에 넣고 예전에 송산리 고분군으로 불리었던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찾았다. 아주 크지 않은 규모의 왕릉원은 작은 동산을 이룬채 공주 도심을 차분히 내려 보는 언덕에 자리 잡았다. 신라 대릉원은 평지에 조성하였는데 백제 왕릉원은 제법 높이가 느껴지는 구릉지에 자리 잡았다. 왕릉원은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공주 10) 490 백범 김구 (공주 10) 490 마곡사(麻谷寺) 6 백범 김구 대웅보전은 지붕 모서리 부분을 대광보전보다 조금 더 들어 올려 날렵하게 만들어 2층 건물의 둔탁함을 상쇄시켜 주고 있었다. 건축물 속에 숨어있는 드러내지 않는 지혜가 놀라웠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을 모셨다. 건물크기에 비해 조금 작게 느껴지는 불상은 대광보전의 비로자나 부처를 고려한 느낌이 들었다. 마곡사는 백범 김구(1876-1949)와도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1896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날, 백범 선생은 국모를 살해한 것에 분노를 참지 못해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인천형무소에서 사형수로 복역하다가 고종의 특사로 사형이 중지된 이후 우여곡절 끝에 1898년 탈옥하여 마곡사로 은신하였다고 한다. 하은당이라 불리는 스님..
(공주 9) 489 마곡사(麻谷寺) 대웅보전 (공주 9) 489 마곡사(麻谷寺) 5 대웅보전 마곡사를 창건하고 중수에 관여한 인물들을 보니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 시대의 고승들이 전부 관여한 사찰로 여겨졌다. 아쉬운 점 하나는 창건 연대를 서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 자료를 보면서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에는 각종 자료가 반드시 일치 될 수 있도록 관계부처 여러분들은 노력을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말씀 드리고 싶다. 현대인들에게는 연혁이 무엇이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역사에서는 기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슷한 듯 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기록과 내용 등은 시간이 지나면 정리가 되겠지만 늘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마곡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곳이 한 때 마(麻)가 많이 나서 마곡사로 불렸다는 설과 ..